채식주의자를 읽고(한강의 연작소설, (주) 창비)
1. 공감 반, 난해함 반
숨도 쉬지 않고 읽었다. 숨을 쉬면 안 될 것 같은 막연하면서도 묵직한 느낌이 나를 사로잡았다. 단순히 ‘좋았다’ ‘나빴다’의 선호로 이 책을 말해서는 안 될 것 같다. 분위기에 눌려서 조용히 있어야할 것을 몸으로 느끼는 어린아이처럼 나 역시도 ‘뭔지 모를 것’에 눌려 단숨에 책을 읽어냈다. 하지만 그 ‘뭔지 모를 것’이 무엇인지는 잘 설명이 안된다. 단지 ‘가슴 먹먹한 느낌을 주는 불편한 것’이었다고 말할 수밖에는 없겠다.
오히려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소설 뒷부분의 해설이다. 소설의 내용보다 더 이해하기 어렵고 난해하다. 책을 도마질하면서 읽고 싶지는 않다. 물론 작가의 의도가 무엇인지, 무엇을 말하고자 함인지 이해하고 소통하고 싶기도하지만 ‘해설’이 길을 안내하기 보다는 어려운 길임을 강조하는 것 같다. 나는 ‘그냥 읽혀지는 대로 그냥 이해되는 대로’ 받아들이고 싶다. 오히려 이 책이 갖는 매력을 난해한 해설로 복잡하게 이해하고 싶지 않다
2. 연작소설의 묘미
이번 책을 읽으며 ‘연작소설’의 재미가 바로 이런 거구나 싶은 매력을 느낀다. 주인공 ‘영혜’를 둘러싸고 채식 주의자에서는 영혜의 남편시점에서 몽고반점에서는 영혜의 형부시점에서 마지막 나무불꽃은 영혜의 언니인 인혜시점에서 영혜의 행동을 바라보는 것이 마치 ‘관음증’환자처럼 재미를 느낀다.
‘우리가 말하는 앎은, 대상이 지닌 속성의 근사치에 가깝다’(225쪽)는 말처럼 누가 누구를 알고 있다는 것은 오해에 불과하며 진실로 알 수는 없다. 그건 나(의식되어지는 나)역시 ‘진정한 나’라는 존재를 온전히 이해하기는 힘들며, 그래서 오히려 나보다 ‘나’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타인이 존재하기도 한다.
영혜를 이해할 있는 것은 아니 ‘근사치의 영혜’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영혜를 둘러싸고 있는 타인 바로 남편, 언니, 형부. 결국 ‘시점의 차이’로 더 잘 이해할 수 있겠다.
가. 채식주의
-폭력에 대처하는 방법
남편에게 영혜는 논리적으로도 그 어떤 것으로도 이해할 수 없는 ‘미친 여자’일 수밖에 없다.
잔잔하고 고요한 호수를 바라보며 그것이 온전한 ‘행복’이라고 느끼는 남편에게 돌을 던진 사람은 아주 평범하다 못해 특별할 것 없는 영혜이다.
남모를 열등감의 원인이었던 작은 성기까지 그다지 신경 쓰이지 않을 정도로 꿇리지 않는 결혼조건에 부합된 영혜를 선택했고 나름 5년 동안의 결혼생활은 편안했다. 평온하고 남들처럼 특별하지 않는 것이 ‘잘사는 것’이라고 여기는 남편에게 영혜는 이런 조건에 부합된 아주 적합한 여자였다. 이런 아내가 자신의 삶 전부를 뒤흔드는 삶의 훼방꾼이 되었다. 결혼이라는 것은 ‘끌림’이 있는 사람과 하는 것이라 믿을 만큼 감성적이지도 ‘책임과 의무감’으로 자신을 희생할 만큼의 어리석은 사람도 아닌 남편이 영혜를 버린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남편도 꿈을 꾸었다.
내가 누군가를 죽이고 있었다. 칼을 배에 꽃아 힘껏 가른 뒤 길고 구불구불한 내장을 꺼냈다. 생선처럼 뼈만 남기고 물컹한 살과 근육을 모두 발라냈다. 그러나 내가 죽인 사람이 누구인지는 잠에서 깨어난 순간 잊고 말았다(61~62쪽)
남편은 본인이 죽이고 있는게 아내라는 것을 어렴풋하게나마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영혜의 육식거부는 아버지로부터 시작되었다.
(전쟁에서) 사람을 일곱을 죽이고 자랑스러워하는 아버지. 폭력과 강간이 일상화된 집. 길을 잃었을 때 오히려 집을 찾지 못했으면 하는 영혜의 깊은 마음에는 아버지에 대한 분노가 자리하고 있다. 영혜는 자신을 물었다는 이유로 집에서 키우던 개를 잔인하게 죽이는 장면을 목격한다. 오히려 죄책감에 외면할 수도 있었지만 오히려 죽어가는 흰둥이의 두 눈을 뚜렷이 마주한다. 영혜는 거품 섞인 피를 토하며 죽어가던 흰둥이의 핏발선 눈동자를 보면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영혜는 자신을 벌하듯 한 수저 그 개의 살점을 삼킨다. 그러나 자신을 용서하지 못한다. 그 것은 꿈으로 나타난다. 시뻘건 고깃덩이, 이빨에 씹히던 날고기의 감촉, 옷에 물든 핏자국…….
아마도 영혜의 분노와 죄책감이 의식세계(꿈)로 점차 표출된 건 무미건조하게 살아낸 오년간의 결혼생활이다.
남편은 아버지와 다를 바 없는 또 다른 폭력을 휘두른다. 무관심이라는 정신적 폭력. 이미 아버지로부터 영혼은 죽임 당했고 간신히 숨만 붙어있던 영혜가 할 수 있었던 건 스스로를 죽이는 행동 말고는 또 다른 선택은 없었을 것이다.
손목은 괜찮아. 아무렇지도 않아. 아픈 건 가슴이야. 뭔가가 명치에 걸려 있어. 그게 뭔지 몰라……. 한번만, 단 한번만 크게 소리치고 싶어. 캄캄한 창밖으로 달려 나가고 싶어. 그러면 이 덩어리가 몸 밖으로 뛰쳐나갈까....아무도 날 도울 수 없어. 아무도 날 살릴 수 없어. 아무도 날 숨쉬게 할 수 없어.(60~61쪽)
나. 몽고반점
-거부할 수 없는 ‘독이 든 잔’
이러한 영혜를 완전한 타인이자 ‘남자’인 형부는 ‘끌림’을 느낀다.
남자에게 있어 ‘끌림’은 원초적 본능(섹스)이며 ‘예술적 영감’이다. 지금껏 단 한번도 느끼지 못했던 ‘강열한 끌림’은 그 어떤 것으로도 조절할 수 없다.
우리는 나와 비슷한 존재에게 매력을 느끼기도 하지만 오히려 내 주변에 있지만 잘 알 수 없는 사람에게 끌린다. 더구나 그 여자가 자신을 죽이는 ‘자살’을 시도한 사람이라면 ‘스스로를 죽이는 행동’을 한 불편한 중압감이 남자로써의 보호본능을 자극했을 것이며, 또 그녀가 상상만으로도 가까이해서는 안 되는 금기시되는 ‘처제’라는 가족 같은 존재이기에 더욱 강열하게 다가왔을 것이다.
남자 여자라는 것은 때론 이성적관계로 설명되어지지 않는 원초적으로 알고 싶은 대상이며 신비한 것일 수밖에 없다. 더구나 자신의 예술적 감각을 불러일으키는 몽고반점을 가진 존재야 말고 인생의 많은 것을 내주고서라도 갖고 싶은 것일 수 있다. 더구나 심심한 예술가(타고난 예술적 끼가 부족한)인 남자는 자신의 예술적 열정을 불러일으키는 영혜야 말로 거부하기 힘든 ‘독이든 잔’이었을 것이다. 그것이 단순한 욕정이든 아님 예술적 열정이든 그건 중요하지 않다. 예술가에게는 그 두 개는 굳이 구분할 필요도 없거니와 구분할 수도 없는 것이다.
‘사십년 가까이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찬란한 희열’이라는 표현. 뒤늦게 배운 도둑질이 무섭다는 말이 있다. 강열하면서도 본인도 어찌할 수 없는 끌림(욕정)을 예술로 아름답게 승화시킬 수 있는 남자야 말로 그것이 도적적으로 용납된 행동이든 아니든 난 이해하고 싶고 안아주고 싶은 남자이다
처제와의 관계를 인혜에게 들키고 남자는 베란다에서 뛰어내리려한다. 주변인의 이해가 필요한 게 우리 사람들의 관계라지만 처제와의 한번의 성교가 죽어야할 만큼 대단한 잘못이라고 정한건 또 다른 폭력은 아닌지 묻고 싶다.
다. 나무 불꽃
-시간은 흐른다. 시간은 여전히 흐른다.
인혜는 어쩌면 우리의 모습을 닮았다. 그래서 더 ‘짠’하다. 엄마/언니라는 존재는 쉬어서는 안된다. 비가와도 눈이와도 나에게 어떤 일이 생기더라도 아이에게 ‘밥’을 주어야하고 함께 있어 주어야하는 존재이다. 잠시 파업이라도 하고 싶겠지만 그렇게 할 수 없는 존재가 바로 엄마/언니라는 존재이다. 더구나 아빠라는 존재가 이러한 엄마의 일에 전혀 협조하지 않는다면 엄마/언니가 느끼는 힘겨움은 이루 말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차라리 ‘엄마’라는 역할을 내버릴 수도 없는 그런 존재가 인혜였다면 그 힘듦에 차라리 자신을 내려놓은 이가 영혜였을 수 있다.
‘그때 그랬으면 어땠을까~~ ’하며 자책과 영혜의 ‘자신을 향한 폭력’을 안타까워하는 인혜의 모습이 어쩐지 우리를 닮아있다. 그래서 영혜가 더욱 가슴 아프게 다가온다.
그를 사랑한다는 확신은 없었지만 자신을 좀 더 위로 끌어올려줄 무엇인가가 필요했던 것이다.(193쪽) 인혜는 문득 이 세상을 살아본 적이 없다는 느낌이 드는 것에 놀랐다. 사실이었다. 그녀는 살아본 적이 없었다. 기억할 수 있는 오래전의 어린 시절부터, 다만 견뎌왔을 뿐이다.
자신의 몸에 이상이 없다는 것을 아는 순간 뜻밖의 고통을 느꼈다. 살아야 할 시간이 다시 기한 없이 남아있었는데 전혀 기쁘지 않았다(197쪽)
문득 그녀는 이 순간을 수없이 겪은 듯 한 기시감을 느꼈다. 고통에 찬 확신이 마치 오래 준비된 것처럼. 이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은 무의미하다. 더 이상은 견딜 수 없다. 더 앞으로 갈 수 없다. 가고 싶지 않다 그녀는 다시한번 집 안의 물건들을 둘러보았다. 그것들은 그녀의 것이 아니었다. 그녀의 삶이 자신의 것이 아니었던 것과 꼭 같았다(200쪽)
-인생은 살아가는 것이 아닌 살아내는 것이다
나무가 불꽃을 일으키는 것은 자신을 때웠을 때이다. 결국 자신을 죽여야만 불꽃을 피운다. 나무불꽃처럼 자신을 태워(희생) 살아가는 영혜의 모습과 나무처럼 땅의 물(생명)을 빨아들이며 꽃과 잎을 피우고 공기를 마시고 싶은 영혜는 어쩜 ‘살아 숨쉬고 싶다’는 강열한 의지를 담고 있는 다른 듯 닮아있는 모습이다.
인생은 살아가는 것이 아닌 살아내는 것이다. 영혜는 살아내야할 이유가 있다. 어릴적에는 동생 영혜가 이유라면 결혼하고서는 아들 인우가 그것이다. 그러나 영혜는 살아낼 이유가 아무 것도 없다. 만약 경제적으로 안정되는 시기로 임신을 미루지 않고 아이를 갖었다면 영혜처럼 자신을 태워 불을 밝혀야할 존재이유가 있었다면 음식을 거부하거나 식물(나무)이 되고 싶은 꿈은 꾸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3. 생명을 살리다
세편에서의 다른 시점에서 보는 ‘영혜’는 너무나 다른 존재이다. 채식주의자에서는 어느 날 꿈때문이라며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생뚱맞게 ‘육식’을 혐오하고 채식주의자가 된 여자이기도 하며(남편의 시점), 몽고반점에서는 지극히 평범하면서도 도발적이고 자신의 욕망을 숨지기 않는 강인한 정신을 지닌 여자이기도 하면서 나무불꽃에서는 타인을 향해 던져야할 칼을 자신에게 돌려 결국은 미치고마는 정신분열적 성격의 약하디 약한 여자이기도 하다.
처음 채식주의자만 읽었다면 영혜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몽고반점과 나무불꽃을 읽고서야 영혜를 이해하게 되었다. 인혜 역시 그러하다. 나무불꽃을 읽고서야 인혜의 고통이 함께 느껴진다. 몽고반점은 약간 색다르지만 예술가로서 또 한 남자로서의 삶과 고통을 느끼게 했다.
다른 듯 닮은 채식주의 전편(3편)에서 흐르는 내용은 ‘온전히 살아 숨 쉬고 싶다’ ‘내 삶을 온전히 살고 싶다’는 것이 아닐까 싶다.
돼지는 앞뒤, 왼쪽, 오른쪽 어디로도 움직일 수 없는 철창에 갇혀 산다. 평균 수명이 20년임에도 6개월 만에 도살된다. 또 다른 돼지들에게 상처를 낼까 봐 태어나자마자 이빨을 다 뽑아버리고 꼬리도 잘라버린다. 도살장으로 가는 길에 처음으로 태양을 보는 경우도 허다하다고한다. 우리가 먹는 고기의 대부분은 참혹한 환경에서 사육되고 잔인한 방법으로 도살된 동물들이다. 그래서 채식은 말할 수 없이 잔인하게 죽어가고 있는 생명을 구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한다.
우리는 매 끼니마다 고기를 먹으며 고기가 우리의 식탁에 오르기까지의 과정(삶)은 애써 외면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삶속에 녹아있는 당연시하는 것들 그리고 애써 외면하고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 마치 고기를 먹듯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볼 일이다.
오늘 나는 아주 색다른 책하나를 읽어냈다.
난해함 반과 공감 반으로 시작한 ‘채식주의자’. 그러나 이 글을 마치는 지금은 ‘공감’으로 변해있다. 이런 것이 알게 모르게 독후감을 쓰는 매력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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