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슴도치의 우아함’(뮈리엘 바르베리 저)을 읽고
‘고슴도치의 우아함’(뮈리엘 바르베리 저)을 읽고
- 2018.10월의 책 -
우리 화실선생님이 요즘 상영하고 있는 블래들리 쿠퍼와 레이디 가가 주연의 ‘스타 이즈 본’ 영화를 보고는 쾌나 감동을 받으신 모양이다. 실화가 아니냐고 묻기도하고 영화 OST를 들으면서 다시금 한번 보러가자고도 한다. 그러나 우리 수강생들 중 이 영화를 본 사람이 없었다. 화가선생님은 자신이 받은 감동과 영화 장면 장면의 느낌을 이야기하며 그 감동을 공유하고자 애쓰셨는데, 우리들에게는 영화가 감동적이었구나 하는 정도로 전달되었을 뿐이다. 그래서 우리가 함께 내린 결론은 ‘다음부터는 함께 영화를 보러가자’로 마무리 하였다.
음악이든 미술이든 아님 영화나 책도 그러하다. 함께 행동하지 않으면 그 감동도 느낌도 공유하기는 쉽지 않으며 한계가 분명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면에서 우리의 독서모임은 함께 읽고 쓰고 이야기하기에 이 모임에 더 애착이 가고 떠나면서도 다시 돌아오기를 희망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이 된다. 물론 ‘글쓰기’의 스트레스은 여전히 함께하지만 말이다.
<고슴도치의 우아함> 이 책은 초반부를 다시 읽었다. 처음 읽을 때는 마르크스를 운운하기에 도대체 뭔 말을 하는지, 등장인물들의 이름은 뭐그리 어려운지 그저 글자읽기에 급급했다면 다시 읽으면서는 후반부까지의 내용흐름을 명확하게 이해하게 해주었다. 그러나 내용의 흐름은 알았지만 정작 그 내용(문구들)은 아직도 어렵고 심오한 철학적 사고이기도하여 내가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 의문이 들기도 한다. 특히 예술, 아름다움에 대한 담론은 깊이 있게 되씹어보고 싶다. 정말 천천히 음미하면서 다시한번 읽고 싶은 책이다.
주인공은 두 인물 르네와 팔로마이다. 닮은 듯 다른 두사람과 이 두사람을 연결시켜주는 오주 가쿠로 일본신사가 이야기의 주류를 이룬다.
고슴도치를 빗댄 인물은 르네이다. 열두살 꼬마 팔로마는 말한다.
“미셀부인에겐 고슴도치의 우아함이 있다. 겉은 진짜 철옹성 같은 가시로 뒤덮여 있지만, 안은 부드럽고 섬세하다. 무딘 듯하나 무디지 않고 몹시도 고독하고 더없이 우아한 작은 짐슴, 고슴도치처럼”(200쪽)
르네는 뚱뚱하고 못생겼고 호감가지 않은 모습에 수위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는 르네의 겉 모습일뿐이며 본 모습은 문학과 철학과 음악과 미술에 관한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으면서 매너 역시 세련되고, 사회적 편견에 내몰려 차별받는 사람과 진정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아름다운 여자이다.
팔로마는 열두살의 꼬마로 ‘인생은 부조리한 코미디에 불과’하다는 것을 일찍 깨닫고 자신의 열세번째 생일날 자살을 꿈꾸는 염세주의 소녀이다. 팔로마는 어항의 물고기처럼 그러한 뻔한 인생은 살지 않겠다며 무의미한 어항의 삶에 도전하듯 자살을 꿈꾸는 것이다.
“나는 조용히, 아주 조용히 6월 16일을 향해 나아갈 것이다. 나는 두렵지 않다. 약간의 후회는 있겠지 하지만 세상은 그저 그렇고 그런 것이지 공주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시든 채소처럼,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니게, 근근이 버티듯 살아서도 안 된다. 오히려 반대다. 중요한 것은 죽음 그 자체도, 몇 살에 죽느냐도 아니라 죽는 순간에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다”(29쪽)
팔로마는 너무나 똑똑하기에 자신의 세계에 갖혀 고독한 삶을 살았던 르네의 어린모습이기도 하다. 이런 팔로마는 르네가 범상치 않은 사람이라는 것을 어렴풋하게 느끼고 오주 카쿠로, 르네와 우정을 쌓아가면서 점차 세상은 살만한 가치가 있음을 깨닫게 된다.
르네 역시 너무나 똑똑했지만 가난했기에, 또 언니 리제트의 죽음을 통해서 일찍이 세상의 이치가 세상은 부자와 가난한자 두 계급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안다. 그리고 자신의 계급에 맞게 살아가야만 생존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깨닫게되면서 세상이 요구하는대로 자신의 지성을 숨기고, 자신만의 껍질 속에서 세상에 순응하는 삶을 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르네의 지성을 알아보고 우정을 나누고 싶어하는 오즈와의 만남을 통해서 자신의 삶을 되돌아 보고 세상 밖으로 나오고 싶은 꿈을 꾸게 된다.
르네와 가쿠로, 르네와 팔로마. 이들은 신분과 계급, 나이차를 넘어서 영혼의 친구가 되고 서로를 통해서 고독한 자신들의 삶에서 필요한 것은 사회적 교감이라는 것을. 사랑과 우정과 같은, 동백꽃 같은 것이라 믿게되고 르네, 팔로마 두사람 모두 지옥같은 끝없는 복도를 지나 세상을 향해 마음의 문을 열게 된다.
“우린 절대 우리의 확신 너머를 보지 못한다. 더 심각한 것은 그 확신 너머와 마주하는 것을 포기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하고만 만날뿐이다. 늘 따라다니는 거울 속에서는 알아보지 못하면서. 만일 우리가 타인 속에서도 우리 자신의 모습만 볼 뿐이라 것을 깨닫는다면.... (중략) 나는 , 나 자신 그 너머를 보고, 누군가를 만나는 기회가 내게 주어지기를 운명의 여신에게 간청해본다.(202쪽)
나쁜 만남이 있었지만 좋은누군가를 만나면서 다른 길을 찾을 수도 있다는 것.(407쪽)
난 처음부터 관심이 간 인물은 르네보다는 팔로마였다(르네의 글보다는 팔로마의 글을 더 이해하기 쉬웠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그래서 그의 ‘심오한 사고’와 ‘세계운동에 관한 고찰’을 더 세심히 읽었다. 그리고 ‘심오한 사고’의 세계 속에서 팔로마의 느낌과 생각을 함께 공유하고자 노력하였다. 특히 작가의 인생에 대한 통찰력이라고 할 수 있는 다음의 부분들이 맘에 와 닿는다.
-침묵이란 내면으로 가는 길로 외부를 향한 삶에 별 관심이 없는 사람들에게 침묵은 아주 필수적이다(114쪽)
-자기 무능력 혹은 정신이상을 자기 소신으로 바궈버리는 것이다(115쪽)
-다도가 단순히 차를 마시는 것만이 아님을 나는 안다. 그것이 의례가 되면 사소한 것에서 위대함을 보는 마음이 능력이 생긴다....다도는 부조리한 우리 인생에 고요하고 조화로운 틈을 만드는 미덕이 있다....자. 차를 마시자. 침묵이 퍼지고, 밖에서는 흔들리는 바람 소리가 들리며, 가을 필들은 소리내며 날아가고, ....그리고 한 모금 마실 때마다 시간은 승화한다.(124쪽)
-바둑경기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 그리고 가장 성공적인 모습은 승리하기 위해 사는 것, 그러면서 상대도 같이 살게 하는 것이다. 상대를 짓밟지 않으면서 자신이 유리한 점을 현실화하는 섬세한 균형이 필요한 게임이다. 결국 삶과 죽음은 건설이 잘 되었는냐 잘못되었느냐에 따르는 귀결이다. 살기, 죽기. 그것은 자기가 건설해나간 것의 결과에 불과한 것이다. 중요한 것은 잘 건설하는 것이다. 나는 건설하며 죽고 싶다(157쪽)
-예절이란 이런 것이다. 상대방에게 ‘내가 당신을 위해 있다’는 인상을 주는 태도(234쪽)
-사랑은 수단이어서는 안 되고 목적이어야 한다(271쪽)
다도나 바둑, 합창, 문법 등에 대한 작가(팔로마)의 견해를 읽으며 사소한 우리의 행위 속에도 깊은 울림이 있으며 그 울림에 의미를 부여하며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삶’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했다. 갑자기 어릴적 읽었던 파랑새가 생각난다. 파랑새를 찾아 집을 떠나 숫한 곳을 찾아 돌아다니지만 결국 파랑새는 집에서 찾게 된다는.... 사소한 나의 행위 속에서도 우주를 볼 수 있듯, 우리 삶의 가치는 결코 크고 위대할 필요는 없다. 소소한 일상의 삶에서 자신에게 몰두하고, 주변인들과 진심어린 애정을 나누며 살아가는 것, 그것 자체만으로도 가치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작가의 미학에 대한, 아름다움에 대한 견해는 너무나 좋다. 아름다움이 더 이상 목적도 계획도 아닌, 우리 본성 자체가 될 상태, 그런 상태가 예술이다. 아름다움이란, 생의 운동 속에서 우리를 자라게 하는 것, 우리의 영혼을 살찌우게 하는 것 말이다.
르네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중요한 건 죽는 것이 아니라, 죽는 순간에 뭘 하는가라고. 르네는 무엇을 했는가? 나는 다른 사람을 만났고, 사랑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우리가 깨달아야 하는 것이 있다. 그건 ‘지금 다시는 오지 않을 시간에 맞서‘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이다. 우연히 들은 음악에서 ‘늘’을 찾을 것처럼. 우리 인생은 그렇게 절망 속에서도 지옥 속에서도 긴 복도 끝에서도 잠시잠깐 ‘영원’처럼 ‘아름다움을 찾는 것’이 인생인 것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