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비의 무게를 읽고
아름다운 한편의 영상과도 같은 책!
가슴이 먹먹하다고나 할까? 달리 표현할 말이 생각나지 않는다. 아름답지만 너무나 슬픈 한편의 영상을 본 듯하다. 슬프고도 아름다운 절묘한 조화로움과 비장함. 아니 숭고함마져 느껴지는 한편의 시를 보았다.
밖에는 눈이 내린다. 올 겨울에 처음이자 마지막인 듯한 함박눈이... 잠시 내가 어디에 있는지를 잊었다. 죽은 어미의 까만 털 위로 내리던 하얀 눈송이가 이와 같았을까 생각해본다 사냥꾼이 머무는 오두막의 지붕과 땅을 온통 하얗게 뒤덮을 눈. 그 장엄한 침묵의 시작 또한 이러한 작은 눈송이들일 것이다. 책을 덮은 지금 마치 여름날 산양의 왕이 맛본 별들의 소금 맛이 지금의 내 심정 같지 않을까 상상한다.
자연예찬! 자연의 일부로 살다.
읽으면서 헤르만 헷세의 자연예찬과 어딘지 모르게 닮아있다는 느낌이다. 헷세의 자연이 봄이라면 에리 데 루카의 자연은 무성했던 청록의 잎이 지고 스산한 찬바람이 부는 늦가을을 견디며 겨울에 접어든 느낌으로 다가온다. 헷세의 자연이 생기이며 탄생과 삶을 말하고자 했다면 에리 데 루카의 자연은 거스를 수 없는 자연의 법칙인 치열한 생존, 순환, 죽음과 더 맞닿아 있다. 산양의 왕과 사냥꾼 모두 대자연의 섭리에 순응하고 자연의 일부로 살다가 죽음을 맞이하면서 평생의 적이 친구로 하나가 되어 덧없는 생을 마감한다.
“인간은 산을 오를 때 뒤꿈치를 들고 그저 산을 스쳐 지나가는 객에 지나지 않는다는 마음으로 통과해야만 합니다. 우리는 아름다움으로 충만한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그 아름다움이란 단순한 장식품이 아니라 바로 자연의 힘입니다.”(6쪽) ‘그의 인생은 계절의 운율을 타고 세상을 따라 흘러간다. 끊임없이 혼자만의 힘으로 구축해온 인생이었지만 그러나 그것도 온전히 그의 것은 아니었다. 되돌려주어야 할 물건이었다’(86쪽)
에리 데 루카의 이력은 독특하다. 기계공, 트럭 운전사, 미장이 등을 거치며 현제 성서 연구가이며 등반가로 활동한다. 이러한 전력이 있어 아름답고도 웅장한 이 책 이 탄생되었나 보다.
나비 무게만큼의 삶의 무게!
나비의 무게 ... 실제 나비의 무게는 얼마나 될까? 채 50그램도 안되는 무게이다. 우리 삶의 무게가 그리도 가볍다. 예전 한 영화에서 이런 장면이 있었다. 창문으로 비들기가 날아들었다가 사람의 소리에 놀라 프드덕 날아오른다. 이런 비들기의 움직임에 옆에 있던 벽돌이 비스듬한 창틀에서 미끄러져 길을 걷던 한 여자의 머리 위에 떨어진다. 쓰러진 여자 위에 허망한 바람이 불고 그녀의 홀로 남겨진 아들의 눈동자에 맺힌다. 더 안타까운 것은 그 아들은 아름다운 하룻밤의 인연으로 세상에 태어난 사랑의 결실이었던 것이다. 그 아들의 눈동자에 맺혔던 어머니의 죽음은 무엇이었을까? 그 아들이 짊어질 세월의 무게를 알기에 또한 인간의 삶이 그리도 허망하게 끝날 수도 있음을 알기에 세상의 주인이 슬픈 눈으로 우리를 지켜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이다. 우리는 그 가볍고도 허망하기 짝이 없는 우리 인생을 좀 더 깊이 있게 응시할 필요가 있다.
그럼에도 세월의 무게를 견디며, 살아가며...
부처님이 고행하던 시절 한 마리의 새가 부처님 가슴으로 파고든다. 그 새는 아귀에게 쫓기고 있었고 부처님에게 자신을 살려달라 애원했던 것이다. 부처가 새를 품어주자 아귀는 새는 자신의 생명유지를 위한 유일한 것이니 그 새만큼의 먹이를 달라고 한다. 부처는 자신의 엉덩이 살을 떼어주며 새 보다도 더 큰 무게의 살점을 주면서 새를 살려주라 청한다. 그러나 아귀가 들고 있던 저울은 새의 무게보다 훨씬 더 많은 부처의 엉덩이 살임에도 불구하고 평형을 이루기는커녕 너무나 가벼운 것이었다. 그러자 부처는 자리에서 일어나 새의 반대편에 올라섰다. 그제야 그 저울은 평행을 이루었다는 이야기이다. 누구에게나 생명의 가치는 이와 같다. 비록 산짐승의 생명이든 부처라는 때달음을 얻은 성인의 생명이든 모두 존귀하고 가치있으며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절대적인 가치를 가지고 있는것이라 말해주고 있다.
비유가 적절한지는 모르겠지만 그래서이다. 우리가 맞다뜨리는 죽음이라는 하나의 길로 통함을 알지라도 우리의 삶을 소중하게 여기며 치열하게 살아야하는 이유이다. 그러한 치열한 삶 끝에 남겨지는 것이 가볍디가벼운 깃털 하나일지라도 말이다
내일 내가 지금처럼 따뜻한 커피와 마주할지를 아는 이는 세상의 주인밖에 없다. 비록 그 끝이 오늘 밤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아니 생명을 가지고 있는 모든 것들은 그래서 지금 숨쉬고 있는 현재에 온전히 몸을 던져야 한다. 그것이 생명을 가진 모든 것들의 숙명인 것이다.
난 늙고 보잘 것 없이 길고 긴 늙음의 시간을 견디며 죽음에 이르기를 학수고대하는 어머니와 마주하고 있다. 그 강인했던 어머니, 그가 있기에 난 불행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그녀가 있어 세상의 어떤 어려움도 나를 피해가리라 믿었다 그러한 어머니가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계신다 그리고 얼마 안있어 새끼염소의 크고 고요한 눈망울에 맺혔던 깊은 슾픔과 세상의 주인이 사냥꾼을 향해 바라보던 고요하고 깊은 시선과 마주할 날이 다가오고 있음을 안다. 그런들 또 어찌하겠는가 그것이 숙명인 것을.
난 이 책을 읽으며 내내 안타까웠다. 사냥꾼과 산양왕의 고독함에 대하여 그리고 그 고독함이 내게는 전염되지 않기를 간절히 소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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